상실 이후 마주한 숭고함과 존재를 이루는 우주 - 영화 <애프터 양> 비평
차례
Overview
- 영화가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 영화 <애프터 양>은 그 제목에 걸맞게, ‘양’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전부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양’ 자신의 기억 장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과정을 한 번 더 거쳐 양에 대해 제시하는 편집은 양을 조명하면서도 그 자체를 내보이지 않아 결국 양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기억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양의 상실 이후, 양이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더 이상 ‘4인 가족’이 될 수 없는 3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양을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보다도, 상실을 경험하는 일상, 그리고 양의 기억을 통해 발견한 일상의 아름다움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강박일 정도로 자연에 집착하며, 자연주의와 전통을 추구하는 완전한 세계화 성립을 전제로 한다. 환경오염이 극심해지고 자연이 타락해서 인간이 굉장히 고통받은 적이 있어, 현재는 자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회로 설정했다1)고 한다. 등장인물의 옷은 황색, 흙색, 벽돌색의 색감을 사용해 만들고, 린넨과 면 소재로 바람이 통하고 흘러내린다.2) 근미래 미국 배경으로 모더니즘 건축이 주3)인 주거 환경 곳곳에 식물들이 있고, 먹거리들을 직접 기르고, 그 먹거리를 익숙하게 식탁에 올려 먹는다. 그러나 강박일 정도로 자연에 집착하며 완전한 세계화 성립을 전제로 해도 여전히 인간 중심으로, 강대국을 중심으로, 주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인간이 쉽게 금붕어를 구매할 수 있고, 아시아인은 마이너이며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되지 않는다. 양YANG의 이름이 “얭Gang”이라 발음되는 것도, ‘원래 발음에 가깝도록 발음하는 데 서양 부모들이 그다지 노력하지 않을 것’4)이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다. 그리고 양과 같은 로봇을 만들 수 있음에도 가족제도가 존재하며, 정체성을 계속 따진다. 미카의 친구들이 미카에게 “너의 부모가 진짜 부모는 아니지 않냐?“라고 묻는 장면과 부모가 실제 부모가 아니라며 따돌림당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을 고민하는 미카를 통해서 다름을 포용하는 사회가 아님도 알 수 있다. 당장 용도로 양을 구입한 제이크마저도 이웃의 자식들이 ‘복제인간’이라며 싫어하고, 스포츠 경기를 즐기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합해 ‘개인이 온전히 개인으로만 기능하는가?’ 의문을 제기한다.
다만 이러한 데서 오는 기시감이나 의문만으로 영화를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줄거리를 전달하는 데에는 필요하지 않을 그 사소한 순간들에서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 증폭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사람의 기억과 ‘양’의 기억을 보여주는 장면과 함께 극대화된다. 사랑하는 이의 잠든 옆모습, 유리창의 비친 모습, 커피를 내리고 노래 듣고 함께 걷고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억들에서 일상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찻잎이 우러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잎이 말라서 찻잎이 되고 따듯한 물에 우러나 마시는 차가 되는 것처럼 마음속에 잉크처럼 퍼 진다. 비경제적일 수 있는 잉여의 테이크가 도리어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테이크들은 양의 기억에 기반하고, 제이크는 양의 3초씩 저장된 기억을 보며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5)하게 되고,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발견해 나가기 시작한다.
- SF 영화라는 장르에서 <A.I.> 등 클론이나 안드로이드가 나오는 sf 작품은 여럿 있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등에서처럼 안드로이드가 ‘진짜’ 기억을 갖고 싶어 한다는 설정, 정체성 가지고 고민하는 모습, 가족과의 갈등 등이 주로 나타나는 설정은 이전에도 있었다. 다만 <애프터 양>은 위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안드로이드를 다룬다. 테크노 사피엔스,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된 세계지만 오히려 안드로이드의 존재성에 대해 고민하며, 일상적이고 잔잔하다. 뿌리를 이 어주는 용도로써 깊게 의존했던 것을 상실한 후 미카와 그의 부모는 다른 형제로 양을 대체할 수 없다는 감각을 느낀다. 영화에서 카이라가 “의존했던 것이 사라졌을 때, 그것이 했던 일들 -문화와 유산을 연결하는 것-에 더 큰 비용이 들어간다.“라고 말했듯이. 고장 난 로봇으로 인한 상실감을 조명하지만, 존재의 유한성과 정체성을 인간만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카이라와 양의 대화에서, 카이라는 ‘끝은 곧 시작이다’를 믿는 프로그램이 사람한테는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좋은 건지는 의문이라 말한다. 양은 자신에게 그런 프로그램은 없지만, ‘솔직히 말해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슬픈 적은?’하고 묻는 카이라에게 ‘무가 없으면 유도 없다’고 말한다.
중국계 미국인인 작가 ‘테드 창’과 ‘켄 리우’의 작품 등 영미권 SF에서 중국 철학은 종종 그려졌다. 이 영화에서도 이름이 ‘양’인 안드로이드의 취미가 나비 수집하기고, 제이크의 직업이 찻집 주인이며, 음과 양의 조화에 대한 언급이나 정확한 레퍼런스는 아니지만, 노자 ‘애벌레에겐 끝이지만 나비에게는 시작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다만 이 영화는 중국 철학 자체를 주제로 쓰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성이 어떻게 미국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이는 방식으로 활용한다. 완전한 세계화와 관련해, 단순 피상적 이미지로서 이를 조명하는 것6)이다. 물성을 통해 어떤 것을 기억하고 뿌리를 인식하는 그 과정과 메커니즘을 설명하며, ‘연결성’에 보다 초점을 둔다.
인간 중심 사고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이에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을 던진다. “혹시 인간이 되고 싶어 했나?” 묻는 제이크에게 에이다가 “너무나 인간다운 질문이지 않냐?“라고 말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 후 제이크는 다시, 한 번도 힘들어한 적도 없는지, 의문을 가진 적 없는지를 묻는다. 에이다는 양이 뿌리에 의문을 가진 적은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양은 인종을 떠나서, 인간을 떠나서 스스로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이는 릴리 슈슈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이나 여분의 컷들에서 흘러나오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Glide를 통해 알 수 있다. ‘바람이 되고 싶다’와 같은 노래 가사에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존재하고, 어떤 형태로든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은 양의 바람을 알 수 있다.
- 원작 소설과 다른 영화만의 매력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알렉산더 와인스타인의 단편소설 <양과의 작별 Saying Goodbye to Yang>이다. 원작에서는 아버지 제이크는 ‘whole foods’라는 가게에서 2교대 근무하며, 양과는 맥주를 마신다. 소설은 양의 기억 장치 없이 아버지의 회상만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나 코고나다 감독은 직접 기억 장치를 디자인하고, 우주로서 양의 기억을 시각화한다. 아버지 제이크는 찻잎을 팔며, 양과 차를 마신다. 이 차이점으로 인한 눈에 띄는 변화는 곳곳에 가미된 동양적 포인트와 인물들의 속도감 차이다. 맥주보다는 아무래도 차가 느리고 잔잔하다. 이는 영화 전반적인 속도감에도 영향을 미쳐 일상의 잔잔함을 극대화한다.
‘차를 마시는 것은 시간과 장소를 맛보는 일이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에서 제이크는 차를 우리다가 양과 함께 차를 우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차를 왜 좋아하는지’를 묻는 양에게 제 이크는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맛에 관해 묻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이에 양은 ‘그렇다면 맛 때문에 차를 좋아하는 것인지’를 묻고, 제이크는 ‘비슷하다’ 하지만, 그것이 차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제이크는 양에게 어떤 상황을 상상하도록 한다. “넌 숲속을 걷고 있고 땅엔 나뭇잎이 있어. 비가 내리다 그쳐서 공기가 아주 축축해. 이 차에는 그 모든 게 담긴 것 같아.” 이를 잘 상상하지 못하는 양은 ‘차(茶)’를 마시며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에 관한 진짜 기억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차는 단순히 동양적 포인트를 가미하기 위한 장치만이 아니다. 차에는 빗물과 역사 그 모든 것이 들어가 있으며, 이는 주제와도 맞물린다. 차의 목적은 삶의 방식과 연결하는 과정이며 차 안에는 세상이 들어있어 장소와 시간을 맛볼 수 있다. 향은 풍미만이 아니고 그 역사에 함축되어 있다. 그리하여 ‘차’는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이고, 전통과 정체성을 말하기에 적절한 소재다. 물론 중국이라는 국가와 차의 연관성 때문도 있지만,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제이크가 찻잎을 파는 인물이라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차(茶)와 기억, 정체성을 떼놓고 말할 수 없다.
차에서 ‘기억’으로 초점이 옮겨지며 기억과 관련해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가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비슷한 장면의 반복에서다. 같은 상황이지만 인간의 시선과 안드로이드의 시선은 다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양이 카메라를 맞춘 후 넷이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기계 인 카메라와 양의 기억 장치는 비슷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중반부에 제이크의 머릿속 가족사 진을 찍는 기억은 기억이 층층이 충돌하거나 반복되는 방식으로, 양의 기억과는 다른 구도로 저장되어 있다. 반복되는 차(茶) 신이나 나비 신의 흐름에서도 마찬가지다. 양의 기억은 그 특정 상황이 3초의 영상으로 단정하게 나열되지만, 인간은 그 장면들을 기억하기 위해 꽤 애써야 하고, 그 충돌이 편집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기억에 대한 차이와 위에서 경험과 기억에 대 해 말하는 차(茶) 신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와 경험하지 못했어도 상상을 통해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차와 기억과 정체성을 아우르며,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거쳐 ‘존재다움’에 도착한다. 인간이지만 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완전히 세계화가 된 사회에서도 명백하다. 영화에서 양은 안드로이드지만 ‘아시아인의 조건이 뭘까?’ 묻는다. 이 ‘양’에 ‘미국 내 아시아인으로서 지니는 정체성과 세계 안에서 나의 위치가 어디일지에 대해, 고국에 대한 기억이 없이 어떠한 정체성을 지녀야 하는가?’7) 끊임없이 고민해온 코고나다 감독이 투영되어 있다. 이렇게 감독은 설정된 기억을 자신의 기억이라 여기고 진정한 기억을 갈망하는 양을 통해, 영화를 통해 기억과 정체성을 질문하며, 도리어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 Summary 영화 애프터 양은 상실을 통해 일상의 숭고함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양이라는 안드로이드의 부재를 통해 남겨진 가족의 일상과 기억의 아름다움을 조명하며,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동양 철학적 요소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이 영화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차와 기억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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